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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

손목이 가늘어 슬픈 남자의 시계

웨딩블렌드 2021. 4. 10. 16:19

 42mm짜리 시계가 커 보일 정도로 손목이 가느다란 남자가 시계를 고르는 과정은 슬픈 탐색의 연속이다. 여러 해 동안 어려운 선택을 하며, 나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다.

 1. 사이즈는 35~40mm
 2. 스타일이 서로 달라야 한다.
 3. 서브를 사지 않는다. 비싼 시계를 사서, 기존 시계를 서브로 만든다.
 4. 무브먼트는 쿼츠.
 5. 필드워치를 사지 않는다. 깨먹어도 아깝지 않은 시계가 필드워치다.
 6. 정장에 어울리면 그게 드레스워치다.
 7.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으면 그게 여행용 시계다.
 8. 조건이 맞는데 여성용이라면… 고민한다.

 원칙을 하나씩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35~40mm

 가장 지키기 힘든 원칙이다. 사이즈를 40mm 이하로 제한하면(그리고 무브먼트를 쿼츠로 제한하면) 고를 만한 선택지가 마법처럼 줄어든다. 시계의 디테일에 따라 다르겠지만, 손목이 가는 남성에게는 36~38mm정도가 최적이다. 35mm는 여성용으로 보이기 쉽고, 40mm는 조금 버거울 수도 있다. 바둑알의 경계, 방간의 경계에서는 1~2mm 차이가 참으로 크다.

 이 사이즈의 비싼 남성용 쿼츠 시계는 오메가 컨스텔레이션, 까르띠에 산토스-뒤몽 정도다. 하이엔드급 중에서는 예거 르쿨트르 미디엄 씬(2518140)이 그나마 남자가 찰 만한 쿼츠 시계이지만, 다이얼이 밋밋하고 회사가 여성용으로 분류하였기 때문에 남자인 내가 '이 돈을 주고 살 가치가 있는가'를 심히 고민하게 만든다.


 2. 서로 다른 스타일

 이런 식이다.

(위 사진은 예시임 : 정답이 아님)


 ① 판 색깔을 다르게 한다.
 ② 베젤이 있는 것과 없는 것, 금색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섞는다.
 ③ 튀지 않는 디자인의 저렴한 시계를 하나 배치한다. (흰판 또는 검판이 좋다)

 4~5개 정도까지는 서로 다른 스타일의 시계를 구입할 수 있다(4개가 넘으면 판 색깔 정도는 겹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시계를 사모으다 스타일이 겹쳐 하나씩 팔며 수업료(?)를 지불하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다. 수업료를 최소화하면, 더 비싼 시계를 살 수 있다.


 3. 서브를 사지 않는다

 100만 원짜리 시계를 가지고 있는데 30만 원짜리 서브를 들이면, 서브를 자주 차도 문제고 잘 안 차도 문제다. 서브를 더 자주 차면 100만 원짜리 시계의 효용이 떨어지고, 서브를 잘 안 차면 30만 원을 버린 꼴이 되니까.

 30만 원짜리 시계로 시작해서, 30만 원짜리를 메인으로 쓰다가, 스타일이 다른 100만 원짜리를 사면 100만 원짜리를 메인으로 삼고 30만 원짜리를 서브로 삼으면 된다. 30만 원짜리는 그동안 충분히 착용하면서 본전을 뽑았으니, 자주 안 차도 아깝지 않고, 가끔씩 서브가 필요한 날에 착용하면 벤치멤버로서 충분히 활약할 수 있다.

 ※깨먹어도 아깝지 않을 시계를 새로 들일 때는 서브를 사도 된다. 지샥이라든가.


 4. 무브먼트는 쿼츠

 이른바 원톱 체제가 아니라면 한 개의 메인과 1~4개의 서브를 굴리게 된다(더 굴릴 수도 있다). 기계식 무브먼트의 유지보수에는 상당한 돈이 든다. 서브가 3개이고, CS센터 유지보수 비용이 30, 50, 70만 원이고, 유지보수를 맡기는 간격이 3년이라면 3년마다 150만원의 지출이 발생한다. 쓸만한 시계 하나를 살 수 있는 돈이 시계의 생명연장을 위해 사라지는 것이다. (유지보수를 예지동에 맡기고 무브먼트가 망가지기 전에 정리하는 사람에게는, 별로 와닿지 않는 설명일 수 있다)

 쿼츠 시계도 유지보수가 필요하다. 몇 년에 한 번은 오일을 발라 주고, 방수 상태를 점검하고, 부품도 갈아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 비용은 기계식 시계의 1/10 수준이다. 유지비를 최소화하면, 더 비싼 시계를 살 수 있다.


 5. 6. 7. 시계 용도의 재정의

 깨먹어도 아깝지 않은 시계가 필드워치다. 정장에 어울리면 그게 드레스워치다.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으면 그게 여행용 시계다. 해밀턴 카키가 하나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티쏘 르로끌이 하나 있어야 하는 게 아니고, GMT기능이 있는 시계가 하나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시계를 둘 이상의 용도로 굴릴 수 있다면 콜렉션이 단출해진다. 시계의 개수를 줄일 수 있다면, 동일한 예산으로 더 비싼 시계를 살 수 있다.


 8. 여성용 시계를 남자가 차도 괜찮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성용이라는 티가 심하게 나지 않으면' 구입할 수도 있다.

 여성용 시계에 들어가는 디자인 요소를 정리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이 특성을 여러 개 지니면 '누가 봐도 엄마 시계', '누가 봐도 누나 시계'가 된다. (언제나 그런 건 아니지만)

 - 스포츠 워치가 흰판이다.
 - 다이얼이 흰판인데 인덱스도 흰색 또는 밝은 회색이다.
 - 다이얼 재질이 MOP이다.
 - 다이얼에 펄이 들어가서 반짝반짝하다.
 - 인덱스 없는 다이얼에 예쁜 그림이 그려져 있다.
 - 인덱스가 다이아몬드다.
 - 베젤에 다이아몬드 장식이 있다.
 - 러그 폭이 18mm 이하다.
 - 33mm 이하다.
 - 35~36mm인데 상당히 도톰하고 동글동글하다.
 - 시계 몸통과 브레이슬릿의 모서리가 둥글게 처리되어 있다.
 - 모서리가 둥글게 처리된 브레이슬릿이 반짝이는 유광 마감이다.
 - 정장용 시계가 아닌데 핑크골드 디테일이 들어가 있다.

 매장 직원도 남자에게 여성용 시계를 거의 추천하지 않는다. 남성용으로 쓸 수 있는 사이즈인 36~38mm 모델을 지목해서 보여달라고 해도, 남성용을 보여줄 때처럼 흔쾌한 반응은 아니다. 물건을 파는 매장 직원의 시선이 이러하다면, 내 주변 사람의 시선에 대해서는 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남성용, 또는 남여공용인 시계를 구입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콜렉션을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여성용 시계가 최적의 후보가 되는 순간이 한 번은 온다. (손목이 정말정말 가늘다면 두 번 세 번 올 수도 있다) 그 때는 위의 요소를 참고하여, 여성스러운 디테일이 최대한 적은 시계를 고르고, 매장에서 시착하며 '과연 진짜로 나에게 어울리는가, 내 옷차림에 어울리는가'를 고민하면 된다. 몇 번을 고민해도 이것이 최선이라면, 그 시계가 남성용인지 여성용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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