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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를 바꾸어도 사진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은 '소득이 증가하더라도 더 행복해지지는 않는다'는 말과 유사하다.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2만 달러의 소득이 산소처럼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듯 충분히 좋은 카메라도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이 '당연함의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는 소득이나 장비가 중요하지 않다는 취지의 경구가 천국의 풍월처럼 들릴 것이다.
나의 첫 디지털 카메라는 펜탁스 옵티오 S4였다. 400만 화소가 좋은 똑딱이의 기준처럼 통하던 시절에 구입한, 400만 화소짜리 똑딱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카메라는 ISO 200이 최대 감도였고, 광량이 조금만 부족해도 심각한 언더가 났다. 노이즈가 많았고, 렌즈의 해상력이 센서의 해상도를 못 따라갔기 때문에 나는 이 똑딱이를 200만 화소 모드(1600×1200px)로만 사용했다.
[ Pentax Optio S4, ISO 50, F/2.6, 1/8s, 2004 ]
노출보정 +2를 하였음에도 언더가 난 사진.
[ Pentax Optio S4, ISO 50, F/4.8, 1/640s, 2013 ]
야외 촬영에서는 그럭저럭 괜찮은 결과물을 내어 주었다.
두 번째 카메라는 후지 S5600이었다. 광량이 부족한 환경에서도 정확한 노출을 잡아 주었고(원래 이게 정상이다), 고감도 성능이 좋아서 기록용으로는 ISO 1600까지도 쓸 수 있었다. 렌즈의 해상력과 센서의 해상력도 그럭저럭 짝이 맞아서, 나는 이 카메라를 500만 화소 모드(2592×1944px)로 사용할 수 있었다. 나는 S5600을 구입하고 나서 실내에서 마음껏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고, 공연 사진을 촬영할 수 있게 되었다.
[ Fujifilm S5600, ISO 400, F/3.3, 1/4s, 2006 ]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2006년 공연 『어머니』. 저화소 카메라여서 가능했던 영혼의 손각대이다.
[ Fujifilm S5600, ISO 100, F/6.4, 1/450s, 2006 ]
허브아일랜드의 하늘. 매트지에 인쇄한 유화 같은 색감은 S5600의 특징인 동시에 한계였다.
세 번째 카메라는 올림푸스 E-410이었다. 렌즈교환식 카메라 중에서는 센서가 작은 편에 속하는 포서드였지만, 내가 사용하던 똑딱이에 비하면 운동장처럼 널찍했다. 계조와 디테일이 좋아졌고, 덕분에 내 사진의 계조와 디테일도 향상되었다.
[ Olympus E-410, ISO 800, F/9, 1/160s, 2007 ]
접사. 이 정도의 디테일과 색감은 S5600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 Olympus E-410, ISO 1600, F/3.5, 1/250s, 2008 ]
답사에서 돌아오는 길. 광량이 부족한 곳에서 ISO 1600을 끌어다 쓰면 밴딩현상이 심하게 일어났다.
네 번째 카메라는 올림푸스 E-PM2였다. 계조와 디테일이 좀 더 개선되었고, 노이즈가 줄었다. 내 사진도 그만큼 향상되었다.
[ Olympus E-PM2, ISO 1600, F/2.8, 1/40s, 2018 ]
카페 이젠. RAW+JPEG 촬영으로 얻은 500만 화소(2560×1920px) JPG 원본이다. 노이즈가 확실하게 개선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Olympus E-PM2, ISO 200, F/11, 1/125s, 2018 ]
용산 전쟁기념관. 그림자 진 회랑의 검은 비석과 하늘의 계조가 모두 살아 있다. E-410이라면 하늘에 화이트홀이 뚫릴 환경이다.
※얼굴을 가리는 편집을 가한 답사 사진 한 장을 제외한, 이 포스팅의 모든 사진은 포토샵으로 손대지 않은 JPG 원본이다.
그리고 이제 다섯 번째 카메라, 니콘 D7200을 손에 쥐었다. 셔터속도 1/50초가, F/8로 확보할 수 있는 피사계심도가, 측정상 3500LPH가 넘어가는 렌즈의 해상력이 불충분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E-PM2보다 성능이 좋은 스냅 카메라를 원했는데, '작은 핫셀블라드'가 손에 들어온 것이다. 중형 카메라로 작업하듯 사진을 찍는 게 좋을지, 핸드헬드로 쓰며 적당히 타협을 보는 게 좋을지 아직은 고민이 된다.
장비가 바뀌면 사진도 바뀐다. 내 사진은 내 장비와 함께 향상되었고, 과분한 카메라가 내 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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